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의 이야기

정조 시대 때 여러 업적을 남기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수십 권의 서적을 저술한 학자 ‘정약용’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지만, 그의 둘째형 ‘정약전’에 대해서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매체에서도 마찬가지로 ‘정약용’에 대해 다룬 적은 많지만, 그의 형을 언급한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주로 사극 작품을 연출해 온 ‘이준익’ 감독의 아홉 번째 사극 토렌트비인 <자산어보>는 그 ‘정약전’이라는 인물을 조명한다. 그는 1801년, 흑산도로 유배를 간 후 어류 도감인 <자산어보>라는 서적을 남겼는데, 극은 정약전의 유배 스토리와 함께 이 서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린다. 실제로, <자산어보>에 서술된 바에 따르면 ‘장창대’라는 동반자와 함께 책을 집필했다는 구절이 담겨져 있다. 서적 상으로는 몇 줄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이준익 감독은 그 구절을 바탕으로 가상의 스토리를 더해 토렌트비로 재탄생시킨다.

전형성을 탈피한 인물 간의 관계

<자산어보>가 재미있는 것은 ‘정약전(설경구)’와 ‘장창대(변요한)’의 흥미로운 관계 설정 때문이다. 유배 이전 정6품의 병조좌랑까지 지냈던 정약전과 흑산도에서 물질을 하는 상민 장창대의 캐릭터는 조선 후기의 서로 대비되는 신분을 상징하지만, 두 사람의 가치관은 각 신분의 전형성과는 정반대로 나타난다. 사서삼경과 성리학을 통달한 정약전은 실용적인 학문에 관심을 갖는 현실적인 인물이고, 어류에 대해 해박한 장창대는 성리학과 조선의 법도를 섬기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보통의 이분법적 접근으로 바라보면, 양반인 정약전과 상민인 장창대의 성격이 반대로 나타나야 하지만, 이 보편적인 요소를 탈피함으로써 뻔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우정, 그리고 갈등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정약전과 창대의 관계는 시작부터 삐그덕거릴 수밖에 없다. 성리학과 주자를 최고로 아는 창대에게 사학죄인으로 몰려 유배를 온 약전이 곱게 보일 리 없기 때문.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전환시키는 계기는 두 인물의 공통점에서 기인한다. 각자가 욕망하는 지식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호기심과 욕심이 매우 크다는 것. 두 사람은 ‘도움’이 아닌 ‘거래’를 명분으로 서로가 가진 지식을 공유하게 됨으로써 서로 간의 입장 차이는 잠시 접어두고 꽤 두터운 우정의 사제 관계로 발전한다. (마치 정치 이념 갈등처럼 끝없이 불통하는 게 아닌, 각자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토렌트비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

약전과 창대는 십 여년간 함께 책을 집필하고, 공부를 가르치며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달랐기 때문에 둘은 끝까지 함께 할 수 없었다. 약전은 임금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지만, 창대는 조정에 나가 자신의 뜻을 펼쳐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상을 지향한다. 서로의 경험과 살아온 환경이 극도로 달랐기 때문에 이 간극은 좁혀지는 게 불가능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팽배했던 두 사람의 입장 차이는 세월의 안정감으로도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비극적인 관계의 말로를 맞는다. 분명 안타까운 끝이지만, 두 사람의 의견 합치가 아름답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산어보>가 120분 짜리의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던 것이기도 하다.

담백하지만 진한 수묵화 같은 토렌트비

이준익 감독의 <동주>처럼 <자산어보>도 흑백으로 화면을 연출했다. 이는 감독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 터. 그렇다면, 왜 <자산어보>가 흑백으로 제작되어야만 했을까.

<자산어보>는 끔찍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한 <동주>보다 백 년쯤 이전의 시기를 다루고 있지만, 19세기 초반의 조선 역시 조정은 부패하고 백성들은 빼앗기기만 하는 암울한 시대에 해당한다. 극 초반, ‘가거댁(이정은)’이 자라지도 않은 소나무를 베는 모습을 보며 약전이 질책하는데, 가거댁은 세를 물리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항변한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가 없으나 당시 조선의 현실이 그러했다. 이 끔찍한 시대상과 가족과 친지도 없는 땅끝마을로 쫓겨난 약전의 암울한 심상이 맞물려 흑과 백으로만 해당 장면이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고 느낀다.

하지만, <자산어보>의 흑백 연출을 단지 암울한 시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적 장치라고만 해석하는 것은 다소 안일한 판단이다. 관객 입장에서 가보지도 못한, 혹은 들어보지도 못한 ‘흑산도’라는 미지의 공간을 흑과 백으로만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웅장한 떨림과 영상미를 전해준다. 분명 담백하고, 절제된 세공법에 의한 그림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얀 화선지에 먹으로만 칠해진 수묵화를 보고도 깊은 감동이나 진한 여운을 느끼듯 <자산어보>도 마치 수묵화와 같은 은은한 전율을 남긴다. 흑백이 아닌 다른 색상을 넣어 연출했더라면, 이 작품만의 담백한 동양미가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때로는 흑백이 더욱 다채롭고 아름다운 영상미와 장면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깊이 눈동자에 새겨준 토렌트비다.

소박한 웃음이 가져다주는 온기

19세기 초반의 조선은 분명 암울했지만, <자산어보>는 마냥 끔찍한 시대의 온상만을 보여주진 않는다. 극 초중반에 약전과 창대의 관계가 조금씩 발전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창대가 잡아온 물고기들로 소박한 식사를 나누는 장면들은 익살과 해학이 공존한다. 그 역할을 가장 뚜렷하게 해내는 존재가 ‘가거댁’ 역할의 ‘이정은’인데, 극이 심각한 경로로 흘러가지 않도록 그 중심을 든든하게 잡아준다. 아프고 힘든 시대지만, 그 속에 내포된 소소한 행복들을 배제하지 않고, 사람냄새를 풍길 수 있게끔 만들어준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

<자산어보>가 일깨워주는 사회적 메시지는 현 시대에 적용해도 유효하다. 오늘날에도 창대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포부의 첫 페이지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돌아갈 길 없이 타락해버린 사회에 신물을 느끼고, 절망과 포기를 택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오히려 절망 쪽이면 다행이고, 타락한 사회에 함께 물들어가며 탐관오리가 되어가는 쪽의 숫자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조금의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탄탄한 카르텔을 형성한 사회악의 연결고리는 이상을 가진 자가 세상에 나서는 것을 저지한다. 이런 끔찍한 세상에서 약전은 창대와 조금 다른 스탠스를 취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데, 이 태도가 꽤나 인상적이다. 비록, 조정에서 쫓겨나 귀양 끝에 죽음을 맞았지만 선하고 약한 인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완수해내는 것. 드넓은 이상을 실현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끈기 있게 내자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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