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출은 70대 노인이다.
덕출의 꿈은, <백조의 호수> 공연에 서는 것이다.

오래 전 그는 사람이 날아오르는 순간을 본 적이 있다.
어린 날의 그는 새처럼 자유로운 그 움직임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었다.
그러나 그 꿈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날아오르는 것, 백조가 되는 것. 어린 날 꾸었던 빛나는 꿈은 그렇게 덕출의 삶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어른이 된 덕출은 집배원이 되었다.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비록 어릴 적 꿈과 다소 다른 방향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우편물을 배달하는 일은 그것만의 가치가 있었다.
덕출은 그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그는 있는 힘껏 일하는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으며 아이들을 키웠다.

그리고 일흔.

장성한 자녀들은 결혼을 했다.
그는 나이 들었고, 토렌트왈에서 은퇴한지 오래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가롭고 안온한 걱정없는 노년이다.
하지만 덕출은 이런 생활 어딘가에서 쓸쓸함을 느낀다.
곁에 있는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잘 자란 자식들을 보는 보람으로도 메꿔지지 않는 공허가 있다.
뭘까. 이게 뭘까. 스스로에게 되묻지만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외면해온 건지도 모른다.

오래 전 잃어버린 꿈이 여전히 그의 안에서 빛나고 있다는 걸.

어릴 적의 꿈은 불씨가 되어 여전히 덕출의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잔잔한 그 불빛을 달래기 위해 덕출은 종종 발레 공연을 보러 가곤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무대에 직접 서 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불쑥불쑥 솟아 올라 씁쓸해지기도 했다.
세월은 ‘포기’를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나는 이미 늦었겠지. 나는 시작할 수 없겠지.
그는 그렇게 오랜 시간 꿈의 뒤편에서 망설이기만 했다.

하지만 정말, 다 끝나버린 걸까.

죽은 친구의 장례식에서, 은퇴한 후배와의 만남에서, 햇살마저 쓸쓸하게 느껴지는 고요한 평일 오후 한낮의 거리에서 그는 생각한다.
이렇게 자식들을 챙기고 조금씩 저물어가다가 나의 생은 끝이 나는 걸까.
무력한 상실감이 몰려오던 그 순간 그의 안에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백조 한 마리가 우아한 몸짓으로 고개를 든다.
하얗고 빛나는 몸을 가진 그 새가 그에게 묻는다.

정말 이대로 다 끝나버려도 괜찮겠어?

아니, 그럴 순 없지.
그 길로 눈여겨 보던 발레연습실에 찾아간 그는 발레를 배우고자 하는 소망을 이야기한다.
여긴 발레학원이 아니라 연습실이라며 거절당하지만, 굴하지 않고 찾아와 청소도 하고 이 일 저 일 참견과 도움을 나누며 눈도장을 찍는다.
그 연습실에는 ‘이채록’이라는 무용원 휴학생이 있다.

채록은 훌륭한 재능을 가졌지만, 현재 슬럼프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과거 축구부 감독을 하다 수감된 채록의 아버지, 그리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그래도 나름대로 혼자서 생활을 잘 꾸린다고 꾸려왔는데, 다가온 아버지의 출소일이 그의 마음을 흐트러 놓는다.

채록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금까지 스승 노릇을 해 온 기승주는, 채록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습실을 찾아온 덕출을 일부러 채록의 옆에 붙인다.
덕출에게는 채록의 매니저가 되어줄 것을, 채록에게는 덕출에게 발레를 가르칠 것을 부탁한다.
그 나이에도 발레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덕출의 열정이라면, 그가 보인 발레에 대한 열성과 애틋함이라면, 채록에게도 뭔가 변화를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채록은 덕출이 싫다.
나이 든 노인이 이제와 발레를 시작하겠다니. 이게 그렇게 쉬워 보이나. 그는 덕출의 간절한 꿈을 그렇게 치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제안을 한다.
기본 동작인 ‘수스’와 ‘밸런스’를 완벽하게 소화하면, 그 자세로 1분동안 버틸 수 있다면 발레를 가르쳐주겠다고. 승주는 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며 채록을 다그치지만, 덕출은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일이 수월해보여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건이 무엇이든, 그것을 해낼 간절함이 덕출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발 뒤꿈치를 들어올리는 동작인 수스, 어깨를 내린 채 팔을 곡선으로 뻗어올리는 밸런스는 보기에 쉬워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발레의 기본 동작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자기 몸의 근육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때 완벽해진다.
근육량이 줄고 행동 반경도 줄어든 덕출이 그 동작을 소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덕출은 끊임없이 시도한다.
안 쪽 방 구석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서도,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발레에 대한 생각 뿐이다.

세월이 기다려주지 않듯, 영원히 우리가 젊을 수 없듯, 몸과 마음의 시계는 다르게만 흐른다.
마음이 이제 막 용기를 낼 수 있을만큼 강해졌을 때, 늙은 몸은 살아온 중에 가장 힘 없고 약해져 있다.
1분. 긴 시간 이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몸은 그 1분을 제대로 버텨주지를 못한다.
늦은 밤 버티기에 성공하지 못하고 혼자 한숨을 내쉬는 그의 작아진 모습은 그래서 더 쓸쓸하고 안타까워 보였다.

토렌트를 보며 그의 모습을 응원하게 되는 것은 이런 과정이 비단 그의 이야기만은 아니기 떄문일 테다.
늦었다는 이유로 포기한 꿈의 한 조각을 우리는 가슴에 하나씩 품고 산다.
2회 중반부의 장면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까닭은 그런 것이다.
그 간의 노력에 결실을 맺듯 1분을 버텨내는 그의 모습.
아슬아슬하게 발 끝으로 끝내 온 몸을 지탱해내는 그 모습.
언젠가 지나가며 한 번쯤 보았을 법한 작고 나이든 뒷모습을 가진 일흔의 노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눈물이 어른거리는 눈동자로 화면 밖의 우리에게 말한다.

그저 노인이라 부르지 말고 여기 있는 ‘나’를 보라고.
나는 백조가 되기를 꿈꾸는, 일흔의 ‘심덕출’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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