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1년, 신유박해로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 호기심 많은 ‘정약전’은 그 곳에서 바다 생물에 매료되어 책을 쓰기로 한다. 이에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청년 어부 ‘창대’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창대’는 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창대’가 혼자 글 공부를 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거래라는 말에 ‘창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다.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점차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간다. 그러던 중 ‘창대’가 출세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약전’은 크게 실망한다. ‘창대’ 역시 ‘정약전’과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정약전’의 곁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결심한다.

토렌트 <자산어보>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이 토렌트는 <사도>, <동주>, <박열>에 이어 역사속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한 이준익 감독의 연출작품으로 흥미롭다. 이준익 감독은 조선시대의 학자 ‘정약전’을 조명하고, <자산어보> 서문에 등장하는 ‘창대’라는 인물을 새롭게 발견함과 동시에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 토렌트는 “한 시대에 위대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옆에는 그 못지않게 위대한 인물이 있다”라고 전한 이준익 감독의 통찰이 담긴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토렌트 <자산어보> 속 정약전과 창대 간 관계의 매개체가 되는 어류학서 ‘자산어보’는 1814년 정약전이 창대의 도움을 받아 흑산도 연해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해양 생물 등을 채집해 명칭, 형태, 분포, 실태 등을 기록한 서적이다. 그림 없이 세밀한 해설로 수산 생물의 특징을 서술한 ‘자산어보’는 해양 자원의 이용 가치는 물론 당시 주민들의 생활상까지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물고기와 해양 생물의 맛을 기록하고 간단한 요리법까지 덧붙인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저술한 서적 중 실용적인 측면을 최대한으로 강조한 책이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여유당전서> 등을 저술하며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던 동생 정약용과 달리, 나라의 질서보다는 민중의 삶을 위한 실질적인 지식이 무엇인가에 더 집중했던 정약전의 사상은 그의 저서 ‘자산어보’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토렌트 <자사어보>는 학식과 명망이 높지 않은 학자 정약전이 흑산도 청년 어부 창대의 도움을 받아 집필한 서적이라는 점에서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두 사람의 관계가 함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토렌트 <자산어보>는 조선시대를 흑백으로 스크린 안에 담아내며, 무채색의 미학을 담은 수려한 영상미를 표현한다. 이준익 감독은 “흑백이 주는 장점은 선명성이다. 현란한 컬러를 배제하면 물체나 인물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형태가 더욱 뚜렷하게 전달된다. 선명한 흑백으로 조선시대 풍물을 들여다보니 그 시대와 인물의 이야기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라고 전한다. 토렌트 <자산어보>는 광활한 자연의 풍광을 한층 깊이 있게 담아내며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영상을 탄생시켰다.

명망 높은 사대부 집안의 학자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정형화된 학문적 수양보다 명징한 사물 공부에 관심을 갖으며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지식이 무언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했다. 정약전은 나라가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하기보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성찰한 인물이다. 정약전은 “주인과 노비가 필요 없는 세상,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배움에 대한 열린 자세로 서양 문물의 가치까지 받아들이며 민중의 삶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흑산도에서 나고 자란 청년 창대는 정약전과의 만남을 통해 식견을 넓히고 성장하지만, 나라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것이 백성을 위한 길이라 믿고 섬에서 힘겹게 서적을 공수해 읽으며 흑산도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창대는 흑산도를 벗어난 세상에서 “성리학과 사학은 적이 아니라 같이 가야 할 벗이며, 벗을 깊이 알면 자신이 더 깊어진다”는 정약전의 말을 뒤늦게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동껍질이 스스로 우는 것입니다.

마을에서 슬픈 일이 생기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스스로 소리를 냅니다.”

정약전이 어둡고 음침한 ‘흑산’이라는 이름 대신 ‘자산’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쓴 이유는 고고한 학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그윽하고 살아있는 검은색으로 세상을 소신있게 물들이기를 바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흑산도의 바다가 흑백에서 컬러로 뒤바뀌며 스크린을 물들이는 토렌트 <자산어보>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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