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를 봤다. 토렌트를 보기 전에 윤여정 배우의 인터뷰나 미나리 관련 내용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봤는데, 짐작했던 것보다 내용이 조금 더 잔잔해서 ‘역시 독립토렌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독립토렌트에 대한 편견이겠지만, 대중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수록 축약하여 관객의 상상력의 폭을 크게 해주는 것이 독립토렌트의 장점인 것 같다.

(아래는 스포가 가득하니, 아직 토렌트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아칸소에 도착한 제이콥은 아내에게 광활한 땅의 흙을 한줌 파서 보여주며 흙 색깔을 보라고, 미국에서 가장 기름진 흙이라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그리고 수맥사를 불러 물길을 찾으려다가 돈이 너무 비싼 바람에 스스로 물길을 찾으려 나선다. 물을 찾아 땅을 파서 호스를 연결하지만 결국은 물이 부족하여 요금을 내야하는 수도를 연결해서 농사를 짓게 된다. 반면 딸과 함께 살기 위해 미국에 온 순자는 손자손녀와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 물가를 찾아 미나리 씨앗을 심는다. 농사의 성패는 결국 물에서 온다. 제이콥은 머리를 써서 물을 찾지만 순자는 숲으로 걸어들어가 물이 있는 곳으로 간다. 제이콥은 농사를 짓기 위해 아칸소에 갔지만 자연의 방식이나 아칸소의 방식이 아닌 여전히 빠르고 효율적인 도시의 방식을, 성공의 방식을 좇았던 것 같다.

미나리는 모든 이민자에 대한 비유이지만 이 토렌트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는 데이빗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심장이 아파서 뛰지 못하는 데이빗을 가족들은 유리처럼 늘 조심스럽게 대한다. 그러나 순자만은 ‘아이들은 다 아프면서 크는 것’이라며 편견없이 데이빗을 대하고 장난을 치고 같이 놀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처음에 ‘pretty boy’ 라는 말에 발끈하며 ‘good looking boy’라고 쏘아붙이고 돌아선 데이빗은 순자의 ‘good boy’라는 말을 받아들이고 ‘strong boy’ 라는 말에는 감격하게 된다. 병충해 없이 어디서나 잘 자란다는 미나리처럼, 아칸소에서 데이빗은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자란다. 그러한 과정을 보면서 어쩌면 누군가에게 딱 필요한 ‘형용사’를 찾아주는 것이 그가 자라는 삶이라는 토양을 가장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하는 웃음, 잘못을 포용하는 너른 품, 무조건적으로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랑, 컴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게 만드는 믿음. 마음 안에 있지만 스스로 반신반의하던 믿음을 불러내주고 북돋워주는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삶에 가장 필요한 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순자가 미나리를 심은 숲은 뱀이 있어서 가지 말라고 했던 곳이기도 하고, 실제로 순자와 데이빗은 뱀을 목격하기도 한다. 뱀을 발견하고 돌을 던지는 데이빗에게 순자가 말한다.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나은 거야. 숨어있는 것이 더 무서운 거란다.” 이 말은 전체 플롯의 주제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족 부양의 책임감으로 십여년을 병아리 감별사로 의미없이 살며 농장의 꿈을 키워온 제이콥. 도시를 그리워하며 헐렁한 차림의 옷을 입고도 진주 귀걸이만큼은 절대 빼는 법이 없는 모니카. 그들은 각자의 욕구를 숨기고 가족을, 돈을, 아들의 병을 명분으로 내내 대립한다. 서로를 구원하고자 이민을 왔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일 수 없었다. 솔직할 수 없는 본심이 그들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뱀이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이 토렌트는 ‘진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바퀴달린 가짜 같은 집이 진짜 집이 되는 순간, 무리하게 끌어오는 물이 아닌 자연의 방식으로 식물을 키우는 물을 만나는 순간, 이상하고 교양없는 가짜 같은 할머니가 진짜 할머니가 되는 순간, 서로의 욕망을 숨기던 가짜 가족에서 가식을 벗고 진짜 마음을 드러내 솔직해진 순간, 수확물 창고가 불타며 가짜 희망이 사라지고 말 그대로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된 순간, 약하다고 믿었던 데이빗이 뛰어가 떠나려던 순자에게 손을 내밀며 진짜 마음을 건네던 순간. 수많은 허상과 환상을 걷어내게 만든 진짜 할머니의 힘, 가족의 아픈 지점들을 드러나게 하고 치유하게 하는 힘이 순자에게 있지 않았을까.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고, 때로는 약도 되는 미나리는 향이 독특해서 처음엔 거부감도 들지만 한번 맛보면 홀릭이 되기도 한다. 마치 코리안스멜이라며 거부당했지만 곧 가족들을 치유해준 순자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미나리는 순자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미나리는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것일까? 토렌트의 대사에서는 그렇게 나왔고, 구글을 찾아보니 병충해에 강하고 잘 자란다고 하니 맞는 것도 같지만. 미나리는 정말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것이 아니라, 물과 바람만 있다면 어디서든 강하게 무성하게 자란다는 의미같기도 하다. 땅과 집이라는 물적 조건보다, 진부한 말이지만 애정이라는 마음과 정서의 힘이 더 중요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척박하고 낯선 땅, 어려운 환경에서 스스로 뿌리내리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갈등하면서도 조금씩 서로를 믿고 사랑을 찾아가며 각자의 병충해를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그들 모두가 미나리였다. 그곳이 싫어 떠났어도 그곳의 방식과 성공을 잊고 다시 시작하기는 쉽지 않다. 고통스러운 과거는 또다른 집착과 환상을 만들기도 한다. 환상을 청산하고 현실을 대면하고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은 때론 고통스럽고 지난하기만 하다. 어쩌면 아칸소에서의 성공은 아칸소의 속도로, 아칸소의 방식으로 천천히 변화해가며 끝내 이겨내고자 노력하는, 마치 미나리 같은 그들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족과 꿈을 모두 얻기 위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은 제이콥도,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동네 교회를 찾고 관계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한 모니카도, 불안한 부모님을 마음으로 견디며 적응을 하려고 노력하던 앤과 데이빗도, 뇌졸중으로 불편한 몸을 끌며 가족에 도움이 되고자 했던 순자도. 결과는 내 뜻과 상관없이 곤두박질치기도 했지만 그렇게 노력하고 애쓴 순간순간이 모두 바람으로 흔들리며 성장하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토렌트는 척박한 땅에 씨뿌려진 코리안 미나리가 프리티 미나리, 굿룩킹 미나리, 스트롱 미나리, 원더풀 미나리가 되어가는 미나리 대장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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