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토렌트에는 안나, 유라, 수연 이 세 명의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
토렌트는 이들이 가장 외면하고 싶었던, 어쩌면 이전부터 계속 애써 외면해왔던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후반부에 보면 이 ‘외면하고 싶은 어떤 것’ 을 토렌트에서는 ‘드라큘라’ 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이 드라큘라가 아마도 안나에겐 엄마와의 관계, 유라에겐 친구와의 이별, 수연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로 인해 착한 딸 콤플렉스가 있었던 안나는 중학생 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엄마가 차갑게 외면한 이후 ‘있는 그대로의 나’를 깊은 곳에 잠식시킨 채 살아간다.
의지하며 지냈던 8년 사귄 애인과 헤어진 후 안나는 점점 무너져갔고, 오랜 시간 묵혀 두었던 엄마와의 갈등도 터지게 된다.

서로에게 오랜 시간동안 쌓인 앙금을 대놓고 감동적이게, 토렌트틱하고 급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닌,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풀어나갔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토렌트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안나의 에피소드는 단순히 안나-엄마 의 갈등만을 다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나는 그동안 자신이 엄마와, 혹은 타인들과 ‘다를 가능성’ 이 아닌 ‘틀릴 가능성’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아왔고, 엄마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외면할까봐 자신을 가두고 살아왔다.
하지만 엄마와의 다툼 이후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엄마 앞에서 다짐한다.
이로써 나는 안나가 ‘이젠 이런 나라도 괜찮아.’ 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고, 이는 엄마와의 화해만큼 중요한 서사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착한 딸 콤플렉스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했던 때가 있었다.
이유는 명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어렸을 땐 정말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 줄만 알았다.
안나와 나는 상황이 다르지만 엄마가 나를 외면하는 게 무섭고 싫은 그 마음만은 어느 정도 공감이 되어 이 에피소드가 더욱 인상 깊게 느껴졌다.
유라는 초등학교 선생님인 안나의 반 학생이다.

전학 온 지형이를 만나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지만 이내 지형이와 자신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재개발때문에 정든 학교, 동네, 그리고 지형이와의 이별을 앞두게 된다.​

어른들의 세상은, ‘순수하다’ 라는 말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 처럼 어딘가 부정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나쁜 것에 찌들어버렸다.
유라는 경제적인 사정으로 이런 세상 속에서 어른들과 또래 친구들에게 상처를 받으며 자라왔다.
하지만 오히려 어려서 돈을 벌 수 없는 자신이 쓸모가 없다며 본인을 탓하고 미워한다. 10살 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말이다.

이후 유라가 떠나는 날, 안나는 유라에게 ‘어른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며 따뜻한 포옹으로 유라를 위로해준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어른들에게 상처를 받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안나가 유라에게 해준 말들은 단순히 담임 선생님으로서 한 말이 아닌, 어렸을 적 안나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그런 따뜻한 말을 해줄 수 있는 진정한 어른이 곁에 있었기에 유라는 지형이와의 좋은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참 다행이다.

유라 못지 않게 지형이 역시 큰 상처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유라가 좋고, 그래서 유라가 이사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오히려 유라를 곤란하고 아프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학교도 가지 않고 누워있을 정도로 상심이 컸던 지형이였지만 돌아오는 부모님의 말씀은 그저 환경 탓, 그리고 유라 탓이었다.
지형이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순수하다는 건 나쁜 말이 아니라고. 그리고 네 잘못도 아니라고.
오랜 무명 밴드 활동을 하고 있는 수연은 전 애인을 1년째 잊지 못하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지에 정신이 팔려 있다.
동시에 수연은 점점 자신이 좋아서 시작한 음악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우연히 다시 전 애인과 재회한 자리에서, 여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전 애인에게 결국 보란듯이 난 음악이 좋다, 음악하며 살거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오래도록 무서워 방치해 둔 사랑니를 뽑아버리듯 시원하고 통쾌하게.

수연이 단순히 전 애인이 그리워서 1년간 방황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별하면서 온갖 모욕적인 말들로 자신의 음악 생활을 무시당한 영향도 컸을 것이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무명 생활 속에서 이별은 수연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이후 음악에 큰 회의감과 막막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런 이유에서 수연이 인생에서 가장 외면하고 싶었고, 그렇지만 결국 마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단순 전 애인과의 재회뿐만 아니라, 타인(=전 애인)이 부정한 나의 오랜 꿈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라고 생각한다.

수연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젊은이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것 같다.우리 모두 결코 평생 외면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 수연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계속 하든, 현실적인 다른 대안을 찾든 그것은 본인 판단의 몫이지만, 어떤 선택이든 자신의 선택이니 그 길을 후회하지 않으며, 언젠가는, 어쩌면 계속 부딪혀야 할 이 고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잘 풀어나가야겠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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