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는 엄마가 남긴 메모가 아직 남아있다.

아버지가 수감되고 어머니까지 돌아가신 뒤, 채록은 나름대로 혼자 자신의 삶을 잘 꾸려왔다.
하지만 괜찮아지려고 해도 과거의 상처는 불쑥불쑥 떠올라 채록의 일상을 헤집어놓곤 했다.
호범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묵묵히 참아낸 것도, 그 날들에 대한 가책이 남아서였다.
호범의 인생이 틀어진 것에 아버지의 책임이 있다면, 자신은 그 책임을 함께 감당해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니가 좋아보이면 안되는 것 아니냐고,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고 이건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묻는 호범에게 채록은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못한다.
다만 혼자 남았을 때 조용히 그 말을 곱씹어볼 뿐이다.
정말로 내게 행복할 자격이 있는 건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의심하면서.

덕출은 그런 채록의 마음을 알아본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단정해보이는 모습 뒤에 숨겨진 채록의 내면을. 스스로조차 방치해서 이미 꽤 오래 곪아있는 마음의 상처를 그는 바로 본다.
하지만 그는 함부로 그 상처를 아는 척하지도, 위로하려들지도 않는다. 다만 어른의 마음으로 묵묵히 채록의 곁에서 그를 돌볼 뿐이다.

누군가의 돌봄의 손길이 닿은 것은 채록에게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길 바란 적은 없었다. 괜한 동정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출소와 맞물려 엉망이 된 일상에 닿은 덕출의 따스한 손길이 위로가 된 것은 사실이다.
나한테 왜 이래 정말. 말로는 그러면서도 어느새 채록은 자기도 모르게 덕출을 의지한다.
동시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 노인을, 그 따뜻한 마음만큼 못다한 꿈에도 생애 남은 열기를 다하는 이 노인을 응원해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막상 덕출은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조금 약해진 모습을 보인다.
내 꿈이 자식들에게 괜한 누가 되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마음도 든다.
일평생 몸이 부서져라 일했지만 단 한번도 자식들에게 여유로운 삶을 선물한 적이 없었다.
해준 것 없이도 이만큼 잘 자라준 자식들에게 고맙지도 않느냐는 해남의 말에 덕출은 동감한다.
그래 내 욕심으로 아이들의 평온한 삶을 해칠 수는 없지. 덕출은 어렵사리 다시 시작한 꿈을 그렇게 내려놓으려 한다.

토렌트는 이 지점에서 자식들이 덕출에게 권유하는 것들을 살핀다. 헬스, 등산, 산책.
자식들이 권유하는 취미생활들에는 덕출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부모인 덕출이 무엇을 좋아하느냐보다 그 나이대의 어르신들이 주로 이어가는 생활 속으로 덕출을 욱여넣는다.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자식들과 함께 하는 산행이 덕출을 불행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노인이라고 규정지어진 그 생활 속에 ‘심덕출’이라는 사람은 누구이며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그 과정에서 소거되어있다.

하지만 덕출은 그 와중에도 말한다.
나는 주황색을 좋아해. 일흔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색이 있고 좋아하는 일이 있다.
아내와 나란히 걷는 시간은 그 시간대로 행복하지만, 그의 안에 있는 텅 빈 마음을 다 채워주지는 못한다.
그의 아내 해남은 그것을 눈치챈다.
자식들에게 피해주지 말자고 그를 주저앉혔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에 수긍하고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이 애처롭기도 하다.

남편 덕출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해남은 안다.
열심히 살고도 잘 살지 못해서 늘 처자식에게 미안해했다는 것도 그녀는 안다.
아버지에게 원망의 말을 쏟는 큰 아들 성산의 뒤통수를 내리친 건 그 모진 세월을 누구보다 그녀가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남편이 평생 잘하고 산 것만은 아니다.
긴 세월 중에 해남 역시 남편을 원망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자기 인생을 다 바쳐 처자식을 먹여 살린 그에게 누구도 함부로 손가락질을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게 자식이라고 해도 해남은 용서치 않는다. 저이의 힘겨운 세월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결국 울며불며 남편에 대한 안쓰러움을 쏟아놓은 해남은, 결국 그 안쓰러운 남편에게 백기를 들어준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남편의 꿈을 지지해주는 같은 편이 되어준다.

토렌트는 3회와 4회를 통해 덕출의 따스한 돌봄이 채록의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 그리고 채록이 그저 자신과 먼 노인이라고 생각했던 덕출을 하나의 존재로 이해해가는 과정을 부드럽게 그려낸다.
덕출과의 만남은 채록으로 하여금 과거부터 끌고 온 마음의 짐들을 덜어내고, 앞을 향해 보다 분명하게 나아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준다.

더불어 토렌트맵은 누군가의 아버지나 남편으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날아오르려는 덕출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덕출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은 등장인물 중 누구와 닮아있는지. 그리고 젊디 젊은 당신에게도 언젠가 노년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이제 정말 ‘나’로서 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 당신이 이루고 싶은 마지막 꿈과 희망은 어떤 색채인지.

‘나빌레라’는 단지 심덕출만이 아닌 그 자리에서 날아오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삶, 당신이 사랑하는 삶의 형태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이야기.
어린 덕출은 춤추는 무용수의 움직임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건 평생 덕출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되어 남았다.
덕출은 이제 그 아름다움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그게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형태라고 해도.

오래 끌어온 차를 손녀에게 물려주고, 그 차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덕출의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삶은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았고, 그는 하나 둘 주변의 것들을 정리해 나가야 함을 안다.
잘가, 붕붕아. 우리 손녀 잘 부탁해.
앞으로 남은 것들에도 부디 그렇게 안부를 전할 수 있도록. 그래서 마지막 순간 미련 없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그는 오늘도 발끝으로 온몸을 지탱하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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