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출은 조금씩 자신과 이별하는 중이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 지금껏 일구어온 삶이 내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소각되어간다는 것. 덕출은 그 병에 대한 이야기를 햇살이 아주 맑은 날 들었다.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화창했다. 눈부시게 화창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서글펐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삶의 생동하는 순간, 자신의 삶은 저물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나’라는 존재가 없던 듯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어서.


처음 채록을 보았던 그 날도 덕출은 기억을 잃었었다.
주변은 흐릿했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에 왜 와있는지조차 아득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그 뿌옇고 먹먹한 세상 속으로 불쑥 날아올랐다.
그건 아주 오래 전 보았던 아름다운 움직임과 닮아 있었다.
어린 날 우연히 발견한 극장에서 보았던 무용수의 도약.
사람이 새처럼 날아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고는 온통 마음을 빼앗겨버렸던 바로 그 순간.


어린 날 뭔가를 간절히 동경했던 그 마음과 함께 흐릿해진 세상에서 안개가 걷혔다.

그 날의 경험 이후 덕출은 발레를 하겠노라 마음 먹었다.
그렇게 마음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발레는 덕출이 평생 간직하고 살았던 이루지 못한 소망이자, 가끔 꽉 막힌 듯 닫혀버리는 세계를 열어주는 유일한 열쇠였기 때문이다.


우연히 덕출의 메모를 발견한 채록은 그간 덕출이 왜 그렇게 열심히 메모를 남겼는지, 왜 그토록 발레에 간절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모두 이해하게 된다.
덕출은 알츠하이머 환자다.
그는 조금씩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덕출의 노트에는 첫 날 채록의 춤을 보았을 때 덕출이 느꼈던 감상과, 그에게 새롭게 시작한 발레가 어떤 의미인지 뺴곡이 적혀 있었다.


“골키퍼 주제에 골문을 지켜야지 왜 골을 니가 넣냐. 스트라이커는 할아버지야.”


덕출의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는 채록을 향해, 그의 친구 세종은 덕출 인생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심덕출’이라는 것을 명확히 얘기한다.
자신의 병에 대해 식구들에게 말할 결심과 결정은 모두 덕출의 것이지 채록의 몫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가족들 중 누구에게도, 그리고 그들의 스승인 승주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채록은 묵묵히 덕출의 곁을 지킨다.
함께 연습을 하고, 목욕탕도 가는 그 사이사이, 덕출과 나누는 대화는 여전히 굳게 닫혀있던 채록 마음의 부분들을 조금씩 열리게 하고, 미처 몰랐던 혹은 외면헀던 진실들을 차츰 깨닫도록 만든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사랑이 뒤섞인 그 알 수 없는 마음에 대해.


한편 발레를 대하는 덕출의 마음은 점점 보다 깊어지고 진지해져간다. 덕출은 ‘심덕출’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끝에 다다라 이토록 아쉬울 줄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발레를 시작할 걸.
나이가 들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 젊은 채록과 달리 요만큼도 유연하지 못한 몸짓은 종종 덕출을 쓸쓸한 감정에 젖게 만든다.


승주는 이런 덕출의 마음을 알아채고 채록과 덕출을 데리고 발레단 발표회에 간다.
거기에서 덕출은 사고로 불편한 다리를 갖게 된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춤을 본다.
그녀가 손끝과 눈빛과 표정으로 표현하는 그 모든 것.
그 순간 덕출은 깨닫는다.
춤은 단지 유려한 움직임이 아니라, 그 움직임에 묻어난 영혼의 깊이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한편 소리는 남 일에 영 관심없던 승주가 발표회까지 따라오며 덕출을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이 낯설다.
승주는 그 까닭에 대해 아주 담담하게 대답한다.


“우아하더라. 그 노인이, 안간힘을 쓰면서 손을 뻗고 다리를 들어올리는게.”


자신에 대한 과신으로 무대에서 내려왔던 그에게, 겸손하고 작지만 간절한 덕출의 춤이 어떤 감명을 주었는지.


승주는 스스로의 오만이 자신을 무대에서 내려오도록 만들었다는 자괴를 가지고 있다.
부상을 입고도 연습에 매진하는 채록을 매섭게 다잡는 것도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채록에게 거는 기대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의 영역과 맞닿아있다.
처음에 춤을 기술이 아닌 ‘감정’으로 췄다고 말하는 채록을 보았던 그 순간부터, 어쩌면 채록이라면 내가 완성하지 못한 춤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상을 입고도 콩쿨을 포기하지 못해 연습에 매진하던 채록은, 자신의 실패를 묵묵히 말하는 승주와 일흔의 나이에도 차분히 꿈을 향해 발을 딛는 덕출의 모습에서 자신의 조급함을 깨닫는다.
당장의 훌륭한 성과를 좇다가 미래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 혹시 조금 늦은 것은 아닐까 불안하더라도 성급히 날아오르다간 영영 날개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결국 채록은 지금은 부상을 회복하는 것에 집중하고, 다음 번 콩쿨을 더 훌륭하게 준비하기로 마음 먹는다.


토렌트킴 춤을 추는 덕출의 성장과 동시에, 그를 바라보는 많은 인물들의 변화를 서서히 다각적으로 그려낸다.
덕출과의 만남으로 인해 무용수로서 한뼘 성장하게 된 채록, 한 노인이 보여준 아름다움으로 인해 ‘발레’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된 승주, 짜여진 플랜대로 살다가 이제야 꿈을 찾겠다고 나선 은호, 포기하지 않는 채록의 모습과 노인의 말에서 자극과 위로를 얻고 이제 변곡점에 선 호범까지.
죽는 날까지 살아있기 위해 발레를 택한 덕출의 선택은 이토록 주변에 잔잔한 울림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또 한 번 길을 잃은 덕출은 흐릿해진 눈으로 길 위에 서 있다.
먹먹해진 세상 속에 덕출은 또 한 번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온통 하얗게 잊어버렸다. 텅 빈 눈 속에는 세상의 무엇도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누군가의 부름 역시 저 너머의 소리처럼 먹먹하게만 들릴 뿐이다.
바로 그 순간, 다시 한 번 까맣고 하얀 덕출의 세상 위로 누군가가 날아오른다. 언젠가 보았던 무용수의 움직임.
너무도 아름답게 보여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린 그의 춤.


“……채록아.”


춥고 하얀 밤의 한가운데에서, 그렇게 채록의 춤은 다시 한 번 덕출을 이 세상에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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