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렌트를 본 이유는 순전히 키아누 리브스(프랭크 역)와 위노라 라이더(린제이 역)때문이었다.
그들의 청춘시절을 보면서 함께 나이가 들었던 오랜 팬으로서 어떤 아련함과 애틋함이 있다.
1992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감독의 [드라큐라]에서 두 사람은 연인으로 출연했다.



조나단과 그의 약혼녀 미나 역이었다.

드라큐라역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게리 올드만, 반헬싱 역에는 최고의 배우 안소니 홉킨스였다.

내가 지금까지 본 수많은 드라큐라 토렌트 중 첫 번째로 손꼽는 작품이다.
이제 30년 가까이 흘러 그때의 눈부신 모습은 세월에 의해 변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잘생기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라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토렌트를 처음 보았을 때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89분에 불과한 러닝타임에 오직 두 주인공의 대사만 있는 형식이라 토렌트보다는 연극적 느낌을 받았다.
그들 외에 누구도 대사가 없다.
오직 두사람만 수다, 수다, 수다! 티키타카를 주고 받는다.
‘티키타카’란 스페인어로 탁구공이 왔다 갔다하는 것으로 축구에서는 짧은 패스로 경기하는 것, 대화에서는 합이 잘 맞아 빠르게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한다.
암튼 주구장창 수다를 떤다. 인물의 클로즈업 샷도 거의 없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시점이다.
게다가 사회문화적 차이인지 모르지만(내가 고지식한 인간이라 그럴지도), 살짝 공감이 안가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토렌트를 보았을 때 진정한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프랭크와 린제이는 데스티네이션 웨딩의 하객들이다.
데스티네이션 웨딩은 하객들이 휴가 겸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특별한 장소를 빌려 며칠간 진행하는 결혼식이란다.
결혼식의 신랑은 프랭크의 어머니만 같은 동생이자, 5년전 린제이와의 결혼을 5주 남기고 엎어버린 전 약혼자다.
그런 인연에도 그들은 처음 얼굴을 본 사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주변인들을 통해 들은 말로 인해 상대방에 대한 인식도 그리 좋지 않다.
프랭크는 동생과 사이가 안 좋지만, 어머니의 당부에 어쩔 수 없이 왔다.
린제이는 5년 전에 결혼 파기와 관련해서 전 약혼자에게 소송을 걸었고, 결국 부모님의 돈만 소송비로 날렸지만 이제는 쿨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왔다.
하지만 사랑과 결혼에 대한 갈망이 남은 린제이는 전 약혼자의 결혼식을 보고 미련과 집착을 떨쳐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사소한 말싸움을 시작하게 되고 소형비행기 안에서는 나란히 앉게 된다.

상대방의 드레스와 자켓을 칭찬하다가 서로 빈정상하게 되는 과정도 우습다.

호텔은 옆방이고(게다가 문이 연결된), 결혼식 후 연회의 리허설에서는 옆자리다.
둘 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과는 잘 알지도 못한 터라 꿔다놓은 보리자루마냥 입다물고 앉아 있기 뭐하니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그들의 주제는 신랑과 신부, 프랭크의 어머니와 전 남편, 전 남편의 부인에 대한 뒷담화부터 끊임없이 이어진다.

대화가 재미있고 맛깔스럽다. 역시 남의 뒷담화는 즐겁다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하객을 위한 프로그램인 발마사지, 와이너리 투어, 야외게임 등과 일몰이 지는 언덕 위에서 치러지는 결혼식까지 내내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린제이의 제안으로 둘은 산책을 갔다가 결정적인 사건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관계도 전환점을 맞는다.
프랭크는 가족에 대한 상처가 깊어 사랑에 대한 불신이 가득하고 사람들에게 투덜거리고 차갑게 굴지만 어머니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하고, 린제이가 전 약혼자 커플 앞에서 스타일이 구겨지기 싫다며 결혼식장까지 들어서 옮겨달라는 황당한 요청도 들어준다.

물론 그녀의 몸무게에 대한 확실한 표현은 한다. 프랭크답게.

그러나 위험한 순간, 도망가라는 린제이의 말에도 끝까지 함께 한다.

반면 소심하고 엉뚱한 린제이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지 않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여자다.
전 약혼자의 행복한 결혼식이 가슴 아파도 밝은 얼굴로 축하해 준다.
물론 이제 쿨하게 보이려는 이유도 있지만, 신부의 아버지에 대한 린제이의 말에서 따뜻함과 섬세함이 느껴진다.
중년의 두 남녀가 만나 솔직하고 발칙한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과정이 유쾌하다.

말이 통하고 따뜻한 온기를 가진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비록 사랑 따위는 개나 주라는 식의 냉소적인 프랭크에게 토라진 린제이가 자리를 뜨려는 상황에서 TV프로가 끝날 때까지라도 같이 있자고 하는 프랭크의 말에 그녀가 발걸음을 돌린 것도 그 탓이다.

자신이 가족의 비극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사이코패스가 되어 뒤뜰에 시체가 쌓였을 거라는 대사에 토렌트[존 윅] 시리즈가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해잖아, 다만 집 뒤뜰이 아니라서 그렇지.’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중년의 로맨스로 독특한 토렌트였다.

무엇보다 키아누 리브스와 위노라 라이더를 다시 봐서 좋았다.

언젠가 또 다시 그들이 함께 나오는 토렌트를 보게 되기를 바란다.

청춘과 중년을 지나 노년의 모습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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