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말들을 말해주잖아.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래서 불쌍해.

노래를 듣던 중, 유튜브AI가 안내한 노래 속 드라마 대사 덕분에 아이유가 출연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게 되었다. 요약영상을 두 번 보았는데, 결국 정주행 했다. 드라마에 얼마나 집중했으면 혓바늘이
드라마 속 나의 아저씨는
누군가에게는 보호막이 되어주는 어른인 나의 아저씨로 느껴졌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내가 지켜주고 싶은 어른인 나의 아저씨로 느껴졌을 것이다.

저마다의 생존과 욕망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는 세상.
그런 세상속에서,
강한 외력을 견뎌내게 된 이는 강한 내력을 갖게 되고,
강한 내력을 갖게 된 이유로, 더 강한 외력을 견딜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누군가는 강한 외력을 피하는 삶을 살아갈 때,
누군가는 더 강한 외력을 견딜 수 있게 된 이유로
급기야 자발적으로 더 강한 외력의 환경을 스스로 만들거나, 습관적으로 혼자 감당하며
결국엔 경직된 인간이 된다.
어쩌면 인간답지 않은…
인간다울 수 없는…
너무 심하게 경직된 상태.
그렇게 드라마 속 두 주인공의 삶은 그저 고달프기만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에게 자신의 행복은 사라졌다.
그들을 살게 하는 것은 그저 외력과의 싸움이고,
책.임.이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성을 가진 인간이,
보다 지혜롭게 의식을 활용하지 못해
경직된 상태로 사는 불쌍한 존재가 된.


표면적으로 조금 모습을 달리할 뿐,
너무 심하게 경직된, 그래서 너무 불쌍한 두 사람은
그저 자신들이 외력을 잘 견뎌낸다는 이유로,
계속되는 외력을 혼자 감당하고,
그 과정에서
외력을 버텨내느라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지는 살필 수조차 없었던.
결국 인연의 도움으로
자신처럼 심하게 경직된 이를 만나고서야
그 경직됨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경직된 불쌍한 상태를 정확히 보게 되는 두 사람.
자신의 삶이 없어진 이유로, 토렌트 사이트에 대한 두려움조차 잊은 그들.

서둘러 늙기를 바라는 기이한 삶에 대한 희망이 생겼던 것은
육체의 늙음은 스스로에게 외력에 계속 버틸 것을 강요할 수 없게 만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그 어떤 책임감으로 삶을 포기할 수 없기에,
또 삶의 의미조차 잃었기에,
행복의 추구가 아닌,
그저 지독한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삶의 바람이 된 그들.
전혀 다른 모습과 생각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둘은
자신들도 모르게 각자의 모습을 만든 깊은 곳에 있는 동일한 원인들로 인해
직감적으로 서로에게 끌리고,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돕고 지켜주게 된다.
이는
메마른 삶에 수분과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일이 되고,
자신들도 모르게 누구보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위로하게 되며
그저 서로를 돕고 지켜줌이 아닌,
자신을 정확히 보게 되는,
자기치유에 이른다.
그렇게 둘은 그저 외력을 버팀이 아닌,
내력을 발휘해 각자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는 삶을 시작하며 드라마는 끝난다.

드라마 속 나의 아저씨는 어른으로서 일방적으로 어린 사람을 보살피는, 아저씨와 같은 영화와는 다른 모습이고 다른 관계를 만든다.

둘 중 누구라도 이미
자신 안에서 외력을 감당하려함만이 아닌,
자신 밖에서 외력을 버텨내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면?
그래서 누군가 자기치유에 이른 상태였다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관계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이 드라마는 한 편의 영화로 만들었어도 상대적으로 길고 많은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보다 훨씬 강하고 깊은 울림을 줬을지도…

주절주절.

상당한 객관성(자신 밖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을 갖게 된 이에게는 사랑이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상대, 연인이 존재할 가능성이 드물다.
그 어떤 관계도 일방적인 힘에 의해서는 이상적인 에너지를 끌어낼 수 없다.
종속의 관계는 에너지가 배가 되는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보살핌과 의존은 종속의 관계다.
이 드라마에서처럼, 세상의 모든 미성숙한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살피며, 또 세상의 모든 미성숙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이 둘이 공존하는 관계를 통해, 서로가 성장하는, 즉 종속의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상당한 객관성을 갖는 방법을 모르는 미성숙한 어른들이 많은 이유로 불가능한 것이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에너지가 소멸되고 낭비되는 관계 속에 살아간다.

세상에는 상당한 객관성을 가진 이들이 극히 드물다.
당장의 편안만을 쫓는 이들은 보다 많은 경험, 보다 힘든 경험을 쉽게 피한다.
그래서 점점 안목과 이해력은 떨어지게 된다.
마치 더 많은, 더 깊은 근육을 파괴하는 순간을 견딜 수 없어 더 많은 근육과 운동신경을 더 강하게 성장시킬 수 없게 되어 운동능력이 저하되는 것처럼, 시야와 생각의 크기가 작아져만 간다.
그렇게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내력을 갖지 못하는 상태.
두려운 것이 많은 상태. 불안정한 상태로 살아간다.
그 불안정함을 숨기려는 온갖 노력이 삶의 전부가 되기도 하는.

피카소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피카소가 감당했던 넓은 시야와 민감성을 가져야 한다.
비록 구체적으로 그처럼 그림을 그릴 수는 없어도, 그 시야와 민감성을 기꺼이 감당할 준비, 두려움이 없는 상태여야 제대로 작품을 느낄 수 있다.
드라마 후반부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버려진 아이들에 관한 영화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는 막내의 대사에서.
즉, 같은 그림과 영화라도 저마다의 경험의 차이가 수용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에 차이를 만든다. 메타인지와 공감능력, 이들은 지식과 다른 것이다.
메타인지는 그저 학습능력을 향상시킴이 아닌, 보다 뛰어난 자기치유능력의 원천이다.

고흐를 비롯해 수많은 화가들이 열악한 환경을 즐기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은, 그를 통해 보다 많고 깊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됨을 그들의 발달한 민감성이 직감했기 때문이다.
물론 감상과 제작은 다른 것이고, 그저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닌,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더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저 보는 것일 뿐임에도 편견과 두려움은 그대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과연 경직된 이들과 상처가 많은 이들이 불쌍한 이들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이 그저 외력을 버티려는 상태에 머무를 때는 그저 싸움꾼으로 남지만, 자신 밖에서 환경과 자신을 보다 정확히 관찰하게 되면, 그래서 보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스스로를 잘 관리하게 되면, 그들의 경험은 이해력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원인이 된다.

보다 복잡하고 치열해진 현대사회에는 경직된 삶을 사는, 그저 외력으로부터 버티는 것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 어떤 사회도 그들에게 스스로를 자신 밖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전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종속의 관계를 통해 가능한 다수의 사람들을 욕망대로 다스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상당한 객관성이 다수의 의식에 자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상.
경직된 이들로 가득한 경직된 세상.

서로 동등한 기브앤테이크의 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될 경우 관계는 언제나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적어도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군가 계속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될 경우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지만, 권력의 욕망을 떨치고 각자의 자립이 끌어내는 에너지를 활용하고 누릴 수 있는 의식, 마인드컨트롤이 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다.

세상과 삶의 보다 정확한 전체를 볼 수 없는 좁은 시야와 의식에 빠진.
교육할 때, 나이가 어린 학생이든 중년, 또는 고령의 학생이든 모두 나의 몇 마디 말에 깊이 숨겨왔던 눈물을 터트리는 것을 많이 경험했다.
고름을 터트리듯, 마치 그것이 뼈인지 근육인지 자신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굳은, 깊은 속근육의 염증이 풀려 사라지는 것처럼.

그 일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상담하며 그들이 던지는 말의 최초의 원인까지 질문을 가져가며 그 원인들을 이내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깊이 공감한 삶에서 얻은 많은 직간접경험은 보다 빨리 핵심적인 질문을 만들고 답(보다 우선하는 원인)을 찾을 수 있게 했다.

지시가 아닌, 저 드라마처럼 스스로 자신을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빛을 밝혀주는 일을 했을 뿐이었다.

다수의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다고 하지만, 내게는 자기치유능력을 발휘하지 못해 상처투성이로 살아가는 세상이 더 이상하다.

사람들은 나의 자기치유능력까지 그들처럼 잃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자신들이 정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고, 비정상인 상태를 느끼는 불편함을 떨칠 수 있기에 하지만 그 편안함은 당장이란 수식어가 붙기에 그저 불안일 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에게나 타당한 선택일 뿐인 그 편안함. 건강한 이들에게조차 그 근시안적 편안함을 추구함이 당연한 것이 된 세상.

이 드라마를 보며 아이유가 참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런 역할까지 나름 잘 소화해냈다는 것에.
그녀는 연기를 통해 경험하지 못한 삶을 배웠을까?
아니면 모양만 다를 뿐인 드라마 속 삶과 같은 지독한 나날을 견뎌냈기에 필연적으로 이런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저런 인상과 연기력 그리고 열정으로 사기를 치고 살지 않는 것은 사회적으로 참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아이유와 같은 이들은 충분히 보상받을만 하다 나는 생각한다.

어릴 적, 너무 쉽게 나의 표정과 눈물과 말에 속는 어른들을 보며 나는 나의 위험성을 느꼈고, 이후, 지독하게 솔직해지려 노력했다.

사람들은 너무 솔직한 나의 모습을 보며 어리석다 말했지만, 내가 그 선택을 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고, 그렇게 나는 거짓이 소용없는 그림, 미술, 예술을 필연적으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단순한 물질과 기계는 측정 가능한 내구성(내력)을 갖지만, 생명체인, 현대의 그 어떤 기계보다 복잡한 조직과 체계를 가지고 있고, 또한 스스로 성장하는, 무엇보다 자신을 자신 밖에서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내력의 한계는 여전히 측정불가다.

왜 일찍 상처를 받는 아이들이 생길까?
그것은 삶과 세상을 보다 정확히 관찰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사사로운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는 어른들 때문이다.

세상을 지나치게 경계하고 의심하는 아이는 결국 경직된 어른이 되고, 그 어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변과 스스로에게 상처를 만들며 자폭을 항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위험하고 불쾌한 경직된 이가 누군가에겐 불쌍한.
보다 정확히 원인을 들여다본다는 것.

어쩌면 피카소의 그림이나 스피노자의 철학이 내게는 너무 당연하고 편안한 것인데 반해 다른 누군가에게는 머리 아픈 것처럼, 이 드라마 역시 누군가에게는 덮어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너무 쉽게 들추게 하는 이유로, 또 누군가에게는 상상하기도 싫은 어두운(?) 삶을 보게 되는 이유로 큰 불쾌함을 줄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과 사회의 현실을 상당히 정확히 담은 기생충을 보며 많은 이들이 불쾌함을 느끼는 것처럼.

왜 사람들은 자신과 세상을 그대로 보기를 꺼려할까?
내력이 부족함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직감적으로 자신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정보가 오히려 자신의 시스템에 혼란만을 줄 뿐임을, 그래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교육과 예술 그리고 감정조차 과학일 뿐임을.

고통이 아닌 그저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더 강한 내력을 가질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 자신을 건축하면 그만인 것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의식의 게으름에 길들도록 만드는 세상.

작은 위험에 크게 반응하는 이들이 오히려 쉽게 나라를 빼앗기고,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들이 큰 사기를 치는 것에는 둔감하다.
흥미로운 현상이지 않은가?

이런 현상의 원인은,
의식의 놀이터가 좁기 때문이다.
시야가 좁기 때문이다.

소를 챙기고 대를 잃는. 물론 중용 23장처럼 작은 것 또한 중요하다.
그래서 모두 챙겨야 하는데, 그리고 인간은 그것이 가능한데,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교육받았고 교육하고 있다.

모두에게 보이는 밤하늘과 해바라기가 고흐에게는 더 아름답게 보였던 것은, 그에겐 삶과 세상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인듯 보이지만, 한편으로 현실의 단편을 다테일하게 묘사한 이 드라마는, 상처있는 이도, 상처없는 이도, 두려운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에 괜한 두려움을 갖지 않고, 그렇게 보다 세상과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노력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삶에서 더 진하고 아름다움과 행복을 느끼고 추구하기를 원하는, 그런 바람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한 정치가와 철학자의 혁명이 아닌, 저마다의 깊은 철학으로 저마다 보다 진한 행복을 누리는 것임을.
만족이 아닌 행복. 그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은 인간이 관계를 통해 만드는 최선의 에너지가 아님을.

세상에는 거인들이 있다. 그것도 조그만.
그들의 내력은 끝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여전히 측정불가다.
거기다 저런 인상으로 공포를 느끼게 할 수 있는 내력까지 잘 포장하여 편안함을 주니, 그녀의 대박은 이미 필연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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